사실 여름에 루시도 보고 왔는데 루시 보고 나서 기억나는 건 스칼렛 요한슨이랑 USB(....) 뿐이길래 패스했고, 지금 트렌드로 떠오르는 인터스텔라를 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를 SF로 정의해야 할까, 아니면 가족 드라마로 정의해야 할까. 저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 저 하나가 아닐 거라 굳게 믿습니다.
지구를 떠나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배경, 그리고 그 우주를 소름끼칠 정도로 멋지게, 그럴듯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그린 이 영화가 SF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SF일까 하고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이 가족이며, 영화의 끝도 가족인 이 영화가 가족 드라마라고 할 수는 없는가라고 물으면 그것도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평범한 SF 활극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물과는 전혀 다릅니다. 굳이 따지자면 하드 SF+가족 드라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플롯 자체는 거의 예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흘러갑니다. 초반 30~40분을 할애해 보여주는 주인공의 가족 사랑을 보며 잠시 가슴아파 하고, '유령'의 정체가 꽤 높은 확률로 예측 가능합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영화에서 트러블은 당연히 없으면 안되는 것이고 분명 1명 이상의 희생자도 나오리라 예측할 수도 있었죠. 인류의 존망이 걸려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아니, 그런 상황이니까 더더욱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예측 범위 내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토리 자체는 평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결말까지도 비슷한 수준으로 때려맞추는 게 가능합니다.
이 영화의 진면목은 스토리보다 화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없지만 있을 법한 외계 행성의 환경들을 화면 가득히 보여주는 영상미 말이죠. 아름답고, 거대하며, 환상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는 우주에 대한 지식과 이론도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강의'됩니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점 또한 잘 만들어졌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SF보다는 판타지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느낌입니다. 블랙홀 안에서 쿠퍼가 머피의 방을 보는...... 우습게도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모르겠어요. 판타지가 아니라 진짜로 잘 고증된 과학적 현상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나, 웜홀 이론이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수긍되는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블랙홀 안에 존재하는 5차원 공간의 개념은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어딜 보고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되는 시점에서 판타지스럽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지는 거죠.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마법같은 일들을 다 과학으로 설명했으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시점에서 진짜 마법을 꺼내드는 건가요.
인셉션의 예를 들어볼까요. 인셉션의 경우 애초에 패시브(국내판에선 드림머신)의 존재 자체가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인셉션은 '꿈'을 다루는 영화였고, 애초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꿈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구조였어요. 어느 정도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안의 세계에서 패시브 자체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과 같은 취급이었습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이 '저런 게 어딨어'라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스크린 안의 세계에선 당연한 것이라는 그 별거 아닌 사실이 설정에 힘을 실어주죠. 하지만 인터스텔라의 5차원 공간은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도, 스크린 안의 등장인물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인식됩니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최대한 현실적인 SF를 고수하던 초중반부가, 클라이막스에서 판타지로 날아가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거지요. 굳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등장시켜 그것을 스토리의 핵심으로 삼을 거라면, 굳이 초중반을 진지하게 하드 SF로 갈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초반 1시간의 지루함은 대부분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초중반부의 하드 SF를 끝내버리는 클라이막스 부분이 초반부에 잠깐 나오고 사라졌던 가족 드라마로서의 클라이막스라는 점입니다. 클라이막스를 가족 드라마가 가져가 버리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를 진짜 SF로 구분해도 되는 걸까요.
간단하게 인터스텔라의 이야기 전개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배경설명+가족드라마(기) → 하드 SF(승) → 하드 SF+인간의 어리석음(승) → 하드 SF+숭고한 희생(전) → 판타지+가족 드라마(전) →가족드라마(결)
그렇다고 해서 나쁜 영화라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가족 드라마와 하드 SF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클라이막스에 대한 감상은 영화를 보는 개개인에게 맡겨두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물리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할 필요가...
물론 영화 안에선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거 같지만(특히 머피가 버리고 도망쳤네 뭐네 하는 걸 보면) 브랜드 교수의 경우엔 딸에게 가혹하고 막중한 임무를 맡긴 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